영화 <프랭크> 리뷰 및 비평레포트 / 결말포함
프랭크 (FRANK)
[영화 리뷰 & 비평레포트]
부제 : 돈 앤 존, 인정과 부정으로 갈라진 결말
※ 본문에 스포일러 포함됨
영화 <프랭크> 한국판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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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저마다 남들과 구별되는 장점, 다른 말로 ‘재능’을품고있다. 하지만 모두가 자신의 재능에 만족하진 않는다. 재능은 원하는 것을 선택해서 부여받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불필요한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것 일수도,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런데 때때로 사람들은 남과 자신의 재능을 견주며 둘 중 하나를 폄하하면서 괴로워하거나 업신여기기도 한다. 불행은 이처럼 다름에 대한 ‘인정’의 부재에서 시작된다. 나 또한 타인의 장점과 나의 단점을 끊임없이 비교하고 자괴감의 수렁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 때문일까? ‘프랭크’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은 극의 주역인 프랭크도 존도 아닌, 자신의 재능을 인정하지 못하고 결국 자살한 ‘돈’이었다.
프랭크 영화 예고편 중
프랭크 예고편 中
인형탈 속에 얼굴을 숨긴 뮤지션 프랭크, 마이너의 탈을 쓴 진성 메이저 존. 두 사람은 각기 다른 탈을 쓰고 세상을 살아왔다. 프랭크는 밴드의 정신적 지주이자 뮤지션으로서 천재적 재능을 갖고 있으나, 불안한 심리상태로 인해 ‘인형탈’이라는 자신의 세상에서 나오지 못한다. 평소에는 시도 때도 없이 곡에 대한 영감을 얻다가도 탈을 벗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정도다. 프랭크는 자신의 강박감 탓에 샤워하거나 밥을 먹을 때 등 일상에서도 탈을 벗어던지지 못한다. ‘인형탈’은 그 생김새 때문인지 프랭크를 좀더 현실과 동떨어진, 신비감넘치는 괴짜 천재로 보이게 해주는 장치였다. 반면 무엇을 보든 음악적으로 표현하려하는 평범한 회사원, 존에게는 뮤지션이라는 꿈이 있었으나 열정 대비 오르지 않는 능력 탓에 힘들어한다. 서로의 삶을 살아가던 어느 날, 작은 우연으로 존은 프랭크의 밴드 ‘소론프르프브스’에 키보드 연주자로서 영입된다. 존은 음악에 전념하고자 물려받은 비상금을 모두 쏟아 부어넣고 집과 직장까지 뛰쳐나오지만 자신과 음악적 견해가 달라도 너무 다른 멤버들, 부러운 능력을 가졌음에도 탈 속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리더 프랭크에 대한 답답함 때문에 점점 불만이 늘어간다. 밴드에 처음으로 들려준 자작곡이 영 좋지 않은 평들만 듣고 난 후, 의기소침해 있는 존에게 돈이 다가와 그를 위로한다. “‘나는 왜 프랭크가 될 수 없지’라는 생각이 들거야. 하지만 프랭크는 세상에 단 한 명 밖에 없어,”라고 자신의 상황을 빗댄 말들과 함께 말이다.
주인공 존에게 충고해주는 돈의 모습
프랭크의 밴드
돈은 프랭크의 거대한 재능 앞에서 존이 느꼈을 무력감을 위로해주고 그의 존재감을 일깨워 주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프랭크와 비교하며 낮춘다. 돈은 존이 ‘좋다’고 말한 자신의 재능(존에게 들려줬던 자작곡이 돈의 재능을 상징하는 듯 했다)을 인정하지 않고 과소평가하기 바빴고, 결국 곡 녹음이 완성될 무렵 프랭크와 같은 인형탈을 쓴 채 목을 매어 자살한다. 돈의 자살은 생각지도 못한 전개여서 충격적이었다. 여느 타 밴드관련 외국영화처럼 노래를 만들어가며 영화 인물들에게 점점 활기와 희망, 소속감이 차오를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인형탈의 생김새 탓에 마치 눈을 못 감고 죽은 것처럼 보이는 시체가 대롱거리며 매달려 있던 광경은 살짝 공포스럽기도, 재능의 벽 앞에서 무너진 현실을 비추는 듯 차갑기도 했다. 돈의 죽음은 존이 맞이할 수 있는 또다른 결말을 보여줌과 동시에, 자신을 사랑해야 불행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저 살짝 괴기하지만 유쾌한 뮤직드라마라고 생각했는데, 이 사건을 기점으로 영화를 보는 나의 관점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존이 어떤 ‘음악적 성장’을 해나갈까? 가 영화를 보는 나의 관점이었다면, 존과 프랭크가 어떤 ‘인간적 성장’을 통해 탈을 벗어던질 수 있게 될까? 가 중후반부 나의 영화 시청 포인트였다.
프랭크의 밴드 2
프랭크의 재능은 뜨신 열정만으로 실력이 쉽사리 늘지 않던 존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던 것이었다. 때문에 존의 눈에는 세상과 벽을 치고 능력을 보다 넓은 영역에 펼치지 않고 살아가는 프랭크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창작자를 꿈꾸는 입장에서 존이 공감되었다. 오랫동안 고심해야 하는 내용을 누군가는 타고난 예술성으로 단번에 기초부터 마무리까지 해버린다면 얼마나 허무하고 부러울까? 반면에 프랭크는 천재성에 대한 이유없는 거부감으로 어쩔 수 없이 탈 속으로 숨게 된 비운의 천재. 자연스레 둘은 가치관의 차이로 인해 대립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마이너, 메이저가 되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계속 함께하게 된다. 그러던 중 밴드의 생활을 SNS에 연재하던 존으로 인해 엄청난 관객 앞에서 공연할 기회를 얻게 된다. 존을 제외한 멤버들은 반대했으나, 결국 ‘관심’에 대한 존의 욕심을 따라 공연을 대비하게 된다. 프랭크는 다른 멤버들의 걱정을 등에 업고 기대에 부풀어 공연을 준비했지만 결국 너무나도 예민한 예술적 감수성으로 인해 공연을 망쳐버리고 팀은 와해된다.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무대를 준비하는 프랭크
팀이 와해된 뒤, 멤버들은 당분간 각자의 시간을 가진다. 그 중 존은 프랭크 부모님을 찾아가 프랭크가 가면을 쓰게 된 이유에 대해 물어보고, ‘음악에 대한 천재성 때문에 삶의 활기를 잃어버렸다’는 대답을 듣게 된다. 즉, 음악은 프랭크에게 활력을 넣어주는 존재는 아니었지만 재능 탓에 하게 된 것이었다. 뒷막을 알게 되니 프랭크가 굳이 다른 실력자를 구할 수 있음에도 키보드 연주자로 평범한 ‘존’을 골랐던 이유가, 그에게는 없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 가면 뒤에 숨지않아도 되는 ‘자신감’을 동경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국 프랭크와 존 둘 모두 서로 자신에게 없는 것을 부러워하고 있는 처지였다.
존의 생각이 드러났던 장면
어린 시절의 프랭크는 특출난 재능 없이 평범한 다수가 모여있는 주류 사회, 즉 고향을 버티지 못하고 탈을 쓴 채 뛰쳐나왔었다. 하지만 그는 ‘공연장’이라는 또다른 주류사회에서 쓴 실패를 맛보았고, 존으로 인해 최후의 도피처였던 탈마저 부숴지면서 자신이 처음 탈을 쓰게 만든 부모님의 집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부모님의 보호 하에선 지금껏 쓰던 마이너한 곡들을 쓸 수 없었고, 비로소 자신과 같은 마이너들로 구성된 밴드가 진정한 귀환처라는 것을 깨닫는다. 결말에서의 프랭크는 인형탈 없이 멤버들 앞에 나타나 ‘너희를 모두 사랑한다’며 자신의 상처,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내 다시금 진정한 밴드 리더로 돌아온다.
존 또한 프랭크의 행적을 쫓다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서 음악적 재능의 부족함에 대해 마침내 인정하게 된다. 사실 존이 밴드에 있던건 ‘마이너함’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닌 마이너들의 ‘독특함’을 원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는 유튜브의 조회수와 트위터의 리트윗, 답글 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었고, 이는 마이너보다는 메이저에 가깝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해 깨달은 존은 프랭크의 밴드를 미련없이 떠났고, 존에게 깊게 공감했던 나로선 아쉬웠지만 프랭크의 귀환에도 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본래의 회사원이자 홈 뮤지션의 자리로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한다.
‘프랭크’의 엔딩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I Love You All’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 어떤 장면에서보다도 가장 잘 표현했다고 느꼈다.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에서의 ‘너’가 타인 뿐 아니라, 탈을 쓴 나와 탈을 쓰지않은 나 둘 중 하나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인정하며 살아가자.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부정하고 배척하기보단, 포용하고 인정할 줄 알아야 본인에게 맞는 자리가 어디인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은 무엇인지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 ‘돈’과 ‘존’은 한 자음 차이이나, 그 둘 중 누구의 결말을 자신의 것으로 맞이할지는 자신이 가진 재능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탈을 벗게 된 프랭크